미스터리

우범곤 순경 총기난사 사건, 대한민국 최악의 대량 살인

easy9 2025. 4. 23. 21:14

우범곤

 

1982년 4월 26일, 한국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발생한 우범곤 순경 총기 난사 사건은 엄청난 비극이었지. 그 날, 경찰 순경이었던 우범곤은 62명을 살해하였고, 이 사건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대량 살인 사건으로 기록되었어. 이번 일은 그저 연속적인 살인 사건이 아니었어. 우범곤은 사전에 계획을 세우고 무작위로 범죄를 저질렀고, 이 때문에 아무 잘못 없는 수십 명이 사망했어.

 

 

 

그 당시에는 이 사건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는데, 2011년 노르웨이 연쇄 테러범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가 이 기록을 경신했지요. 그러나 기네스 측에서는 우범곤과 브레이비크 모두 해당 기록 보유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어. 그 이유는 자신의 기록을 깨기 위해 범죄를 일으키는 극악무도한 사람이 등장할 수도 있기 때문.

 

 

우범곤은 1955년 3월 18일 경상남도 부산에서 출생하였어. 그는 경찰 집안에서 자랐어. 아버지는 경찰관이었으며, 그 역시 자연스럽게 경찰로서의 진로를 선택하게 되었어. 유년기에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성장한 듯 보였으나, 고등학교 3학년 시기에 부친께서 대장암으로 별세하시면서 그의 인생은 크게 달라졌어.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집안 형편이 기울게 되었고, 이에 따라 우범곤도 점차 나쁜 길로 빠지게 됐어.

 

해병대에서 병역 의무를 이행했고, 우수한 사격 실력으로 특등사수에 선발될 정도였지. 군 복무를 마친 후 경찰관이 됐어. 그러나 음주행태와 연관된 행실로 인해 '광포한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주사가 매우 고약했어요. 이에 따라 업무 부적합자로 분류되어 101경비단에서 밀려나 의령경찰서로 인사 이동되었어. 또한 좌천 되어 1982년 3월에는 경상남도 의령 궁류 지서로 배치되었어.

우범곤 그는 함께 거주하는 사람들 및 마을 주민들과의 관계가 매우 나빴다고 전해져.

 

 

 

1982년 4월 26일

 

그날 우범곤은 밤에 일할 준비를 하기 위해 낮 12시쯤 집에 돌아와 점심식사를 한 뒤 잠을 잤어. 잠든 사이 동거녀가 자신의 몸에 앉은 파리를 쫓기 위해 손을 휘둘렀으나 파리는 날아가고 대신 우범곤의 가슴팍을 내리치게 된 거야. 우범곤과 동거녀 사이에는 심한 언쟁이 있었대.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상태였던 우범곤은 오후 4시 경에 지서로 향했고, 저녁 7시 반쯤에는 술에 취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지. 그 사람은 만취한 상황에서 같이 살고 있던 여자친구를 주먹으로 때렸어. 그 당시 같이 살고 있던 여자친구의 친척 언니가 싸움을 말리기 위해 들어왔지만, 그는 친척 언니에게도 폭력을 휘둘렀지.

 

왁자지껄한 소리에 이웃 주민들이 모여 들었을 거야. 동네 사람들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다들 동거녀의 입장을 두둔하자 기분이 상한 그는 다시 집을 나갔어. 지사로 간 뒤 소속 육군 방위병들과 소주를 퍼마시던 우범곤은 동거녀의 남동생이 와서 경찰이면 다냐고 소리를 꾁꾁 질러대자 이성을 잃었고, 궁류지서장과 허창순 경사 일행이 자리를 비운 궁류지서 뒤편 무기고를 열어 M2 카빈 소총 2자루, 실탄 144발, 수류탄 8발 등을 빼내갔어.

 

 

 

4월 26일 저녁 9시 50분

 

지서에서 나온 후 대구에서 표구사를 운영하던 26세 남성에게 총격을 가하였고, 이후 궁류면 토곡리 전통시장으로 이동하여 조준 사격을 하 마을 주민 3명이 장을 보러 왔다가 총살당했어.

 

저녁 10시경

 

마을의 연락망을 끊으려고 궁류우체국 내부로 진입해서 근무하던 여성 교환원 2명과 야간 숙직 중이던 집배원 1명에게 총격을 가해 사망케 했어. 그러나 교환원이 숨지기 직전 마을 이장 집의 행정전화와 의령 우체국간의 코드를 연결 했고 이는 추 후 저녁 10시34분 주민에 의해 신고가 가능케 한 일이 었어.

 

저녁 10시10분

 

압곡리 매실부락으로 향해 10분 넘게 총기를 난사했고, 이 과정에서 주민 4명과 근처 마을 주민 2명등 총 6명을 살해 했어.

 

 

저녁 10시 30분

 

우범곤 그는 운계리 시장으로 가 7명의 마을 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했어. 심지어 이 곳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수류탄을 던지기도 했어.

 

저녁 11시

 

평촌리에 위치한 상가집에 갑자기 들이닥침. 그는 "급한 일이 생겼다"라고 둘러대더니 문상을 빌미로 부의금 3천 원, 요즘 돈으로 약 4만 원 상당을 냈어. 그 후에는 문상객들과 함께 약 10분 동안 술을 마시며 어울렸어.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또다시 술주정을 하며 갑작스럽게 사리분별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고해. 보다 못한 상주 이종사촌이 따끔하게 혼내며 '경찰이면 다냐? 상갓집에서 예의 없이 이게 뭐 하는 짓이냐?'라고 따지자, 그는 이에 분노하여 총기를 무차별 발사하였고 그로 인해 상주 일가족 등 12명을 총으로 난사하여 살해했어. 그 후에는 불이 켜져 있는 집들을 돌아다니며 총을 마구 쏘아댔고, 이 장소에서만 23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총으로 죽였어.

 

다음날 27일 새벽 5시35분

 

평촌리 마을에 재차 출현하여 친분이 있던 주민의 거주지에 무단으로 침입하였어. 그는 자신의 가족 5명을 모두 깨운 후 지니고 있던 수류탄 2발을 동시에 폭발시켰고, 이로 인해 현장에서 우범곤 본인을 비롯해 4명이 사망하게 됐어.

우범곤의 미친듯한 살해극은 결국 폭사로 끝을 맺게 되었어.

 

 

 

살아남은 것이 아직도 있니?

우범곤 순경의 범죄 중 가장 극악무도한 부분은 어린 아이들과 아기들까지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죽였다는 거야.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아직 살아있는게 있어?"라고 말하며 되돌아가서 그 자리에서 아이를 총살하는 잔인무도한 짓을 저질렀어.

 

또한 우범곤이 마구잡이로 총기를 발사하며 다닐 당시, 한 택시 운전사가 각 집들을 방문하면서 위험 상황임을 알리기도 했어. 그는 "어서 불을 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을 거예요"라고 동네방네 소리를 치고 다녔지. 택시기사의 증언에 따르면, 불빛을 끄고 조용하게 있었던 집들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해. 하지만 이 택시 운전사는 결국 우범곤에게 피살 당한 채 발견 되었고, 당시 불을 끄고 조용히 있던 중 문을 살짝 열어 우범곤을 목격한 사람도 있었다고 해.

 

 

근무 장소를 이탈한 궁류지서장 허창순 경사 일행은 지역 유지로부터 온천 접대를 받고 음주 후 복귀하였어. 밤 10시 50분 경 그들은 길에서 만난 주민으로부터 사건 경위가 담긴 신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였고 궁류 지서로 복귀하였어. 당시 그곳에서 우범곤이 무기를 빼앗아 총격을 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자신이 그 자리에 없어서 천만다행이라며 급히 피했다는 거야. 그러나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지서장 일행은 무기고로 가서 각각 무기를 챙긴 후 출동했지만, 우범곤 순경이 향한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출동하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보였어. 궁류지서 맞은 편에 면사무소가 있어서 만약 거기서 방송을 했다면 우범곤 순경 사건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

 

궁류지서 경찰들이 도망치며 임무를 소홀히 한 결과 상황은 더욱 나빠졌고 그 후 이들은 직무 유기죄로 처벌 받았지. 한편 해당 마을에 거주하던 의령군 민방위과 공무원으로부터 사건 발생 보고를 받은 의령 경찰서 소속 경무과장 신현기와 보안과장 김영석 지휘 아래 전투경찰순경 30명이 당일 밤 12시쯤 현장에 도착하였어.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우범곤의 위치를 찾지 못했고, 칠흑 같은 시골길에서 기습 공격을 받을까 두려워 마을 입구 다리 아래 등 여러 곳에 몸을 숨겼다고 했어. 나중에 경찰은 이 사건을 잠복근무였다고 해명했지. 그러나 이는 오히려 부정적인 반응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어. 이는 주민들이 공격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경찰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지. 더군다나 잠복을 다리 아래에서 한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아.

 

1982년도 그 당시 담당 책임자였던 의령 경찰서장 최재윤 경정은 57살이었어.. 그는 다음 날 부산에서 서장 회의가 예정되어 있다는 이유로 하루 먼저 부산으로 향했다고 해. 그러나 근무지를 말도 없이 이탈한 상황이었지. 보고를 받은 후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범행 장소 근처 다리에 도착한 시간은 다음 날 새벽 1시 20분이었어. 현장에 투입된 의령 경찰서장은 경찰관들을 모아 범인 추적을 시작하기는 커녕, 사상자들을 보고 겁에 질려 바로 궁류지서로 피신하였어. 마을 내 지서에서는 경광등이나 사이렌을 통해 경보를 발령하거나 필요시 예비군을 소집할 수 있었으나 피신을 한거지. 그리고 의령서에서는 자신의 관할 지역 내 다른 경찰서에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어. 결과적으로는 단지 내부 부서에만 현재 상황을 보고했을 뿐이고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어.

 

새벽 2시경에는 마을 주민 2명이 위험을 무릅쓰고 산을 넘어 탈출하였어. 마을 사람들은 큰 일이 발생했다고 다급하게 의령 경찰서에 연락해서 빨리 출동해 달라고 요청했어. 그러나 서장은 어둠 때문에 시야가 제한된다는 이유로 이마저도 거절했다고 해. 새벽 4시가 넘어서야 마산시와 진주시의 기동대가 궁류에 도착했어. 그렇지만 종국에는 이 사건은 우범곤의 폭사로 마무리 지어진 후였어.. 간단히 말해 이번 사건에서는 경찰의 개입이나 제지가 없었으며, 경찰은 발포하지 않았다는 거야. 주민들의 희생이 계속되었고 손쓸 새도 없이 사건은 마무리되었지. 해당 사고로 인해 자그마치 62명의 마을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35명은 부상을 입었어.

당시 의령경찰서장 최재윤에 대한 대법원 공판에서 직무유기 불성립

 

 피해가 커진 이유

 

그날은 마을에서 반상회를 하느라 주민들이 곳곳에 모여 있었고, 밤늦게까지 불을 켠 집들이 많았어. 그리고 경찰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근무지 무단이탈이 흔했지. 궁류지서의 다른 경찰관 3명도 반상회에 가려고 근무지를 무단이탈한 상태였고, 지서장도 마을 유지들이 있는 온천에 접대를 받으러 지서를 떠난 상황이었어. 그때 지서는 아무도 없는 상태였고, 그래서 우범곤은 무기고에서 화기를 쉽게 탈취할 수 있었던 거야.

또, 우범곤이 경찰이었고 사건 당시에도 근무복을 입고 있었던 게 큰 영향을 미쳤어. 주민들은 그를 아무 의심 없이 맞이했고, 문을 열어줬지. 이런 점은 사실 노르웨이 연쇄 테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 그리고 그 당시엔 무장공비들이 자주 출몰하던 시절이라서, 주민들은 총소리가 들려도 그냥 무장공비가 나타난 걸로 생각했을 거야. 이런 여러 가지 상황이 피해를 더 키운 거지.

 

 

우범곤 총기난사 사건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경찰의 무능함과 직무유기, 그리고 우범곤의 악행이 결합된 최악의 대량 살인 사건으로 기억될 거야. 사건을 반성하고 교훈을 얻지 못하면, 그 어떤 범죄도 예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어.